팔만대장경: 천년의 지혜와 정교함을 담은 고려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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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해인사가 아닙니다. 그림으로 제작한 참고용 이미지입니다.



1. 해인사의 역사

남북국시대 신라 애장왕 3년(802년) 창건되었다. 소성왕의 어머니 성목태후와 애장왕은 해인사에 2500 결이나 시납을 했다. 이렇듯 해인사에 신라 왕실이 적극 후원하였다.

 

" 결 이란? 과거에 사용된 토지의 단어로 1결은 약 300~400평이며 2500결은 75만평에서 100만평으로 예상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착하게 살던 노인이 떠돌이 강아지를 데려다가 정성껏 키웠는데, 사실 그 강아지는 용왕의 딸로 잘못을 저질러서 강아지가 되어 속죄하던 중이었다. 속죄를 마친 용왕의 딸은 용궁으로 돌아가 자신을 보살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용왕에게서 도장을 노인에게 주었다. 그 도장은 원하는 것을 쓰고 도장을 찍으면 적은 것이 실현되는 도장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도장을 쓰지 않고, 오히려 도장을 사용해 절을 세우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그래서 바다 해(海)와 도장 인(印)을 써서 해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943년 이후 기술했다고 추정되는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를 참조한 듯한 다음과 같은 전설은 《거제현우두산현암선사중수기(巨濟縣牛頭山見庵禪寺重修記)》에 기록되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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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대의 승려 순응(順應)[2]이 766년 당나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깨우침을 얻던 도중 보지공(寶誌公)의 제자를 만나 《답산기(踏山記)》를 얻은 뒤 보지공의 묘소에서 7일간 법(法)을 구하였는데, 그때 묘문이 열리면서 보지공이 나와 설법하고 의발(衣鉢)과 신발을 주면서 우두산(牛頭山) 서쪽 기슭에 절을 세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한 순응은 가야산에 들어가 사냥꾼의 도움으로 현재 해인사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떠한 약도 효력이 없어 고승들의 도움을 받으려 사람들을 풀었다.

 

가야산으로 간 왕의 사신이 몸에서 빛을 발하는 순응을 발견하고 왕궁으로 청했으나, 순응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왕후의 병난 사연을 듣고는,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쪽 끝을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라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왕에게 이를 알리고 그대로 시행했더니 배나무는 말라죽고 왕후의 병은 나았으므로,[3] 왕이 고맙게 생각하여 순응의 원에 따라 애장왕 3년(802년)에 해인사를 지을 때 인부를 동원하여 일을 도왔다."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 순응과 이정은 옛 대가야 왕족의 후예라고 하므로 그들이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아 옛 대가야 영역인 가야산 자락에 해인사를 창건한 것은 신라 왕실의 대가야 유민 포용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 지금도 해인사 입구에는 창건 당시에 심었다는 나무가 서 있다.



2. 팔만대장경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교 경전의 집대성으로, 약 8만 개의 목판에 새겨져 있다. 이 목판들은 13세기 몽골 침입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팔만대장경의 기원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교 경전의 집대성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이다. 현재는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니다. 팔만대장경은 두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는데, 첫 번째는 고려 현종 때(1011년)였고, 두 번째는 고려 고종 때(1236년) 시작되어 1251년에 완성되었다.



첫 번째 대장경의 제작


첫 번째 대장경은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발원하여 제작되었다. 이 대장경은 약 5,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두 번째 대장경의 제작


두 번째 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다시 제작되었다. 당시 고려는 몽골과의 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불교의 힘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국가적 발원으로, 불교의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 약 8만 개의 목판에 경문을 새겨 완성했으며 제작은 주로 강화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해인사로 옮겨졌다.


3. 팔만대장경의 특징

팔만대장경은 약 8만여 개의 목판에 경문이 새겨져 있어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목판들은 한 변이 약 70cm, 두께가 2.6cm에 달하는 크기이며, 총무게는 약 280톤에 이른다.

정교함: 목판에 새겨진 글자는 정교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보존 상태: 천 년 가까이 된 목판임에도 불구하고, 대장경판전의 독특한 구조 덕분에 훌륭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목재: 목판은 주로 가문비나무와 자작나무를 사용하였으며, 목재를 소금물에 담가 곰팡이와 해충으로부터 보호하였다.


4. 대장경판전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의 대장경판전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대장경판전은 자연 통풍을 이용한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어, 목판들이 천 년 가까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구조: 자연 통풍을 최적화한 구조로,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유지하여 목판의 보존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
건축 연도: 15세기 조선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 팔만대장경의 문화적 의의

팔만대장경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불교 경전의 집대성이지만, 그 이상의 문화적,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국난 극복을 위한 국민적인 염원을 담고 있으며, 고려의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고 불교 경전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경전의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의 제작 기술과 문화적 배경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6. 해인사의 건축물


해인사는 여러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대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목조 건축물로, 자연통풍을 이용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조 덕분에 목판들이 천 년 가까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대적광전: 해인사의 중심 법당으로, 화려한 건축 양식과 섬세한 조각이 돋보인다.


선원: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7. 해인사의 자연 경관


해인사는 가야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해 있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사찰 주변의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은 방문객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가을에 단풍이 절경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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